"남북정상회담을 다녀와서" 김근식 경남대 교수

"방북기간중 옥류관앞에선 김근식교수"

2박 3일의 이번 정상회담은 한마디로 차분한 회담이었다. 남북의 분위기도 그랬고 실제 회담의 진행과정도 그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응도 과거와 달리 매우 차분하고 실용적인 입장에서 절충 가능한 합의점을 찾는 정상적 회담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남북관계 발전의 당연한 결과이고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일상화된 남북관계의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다.

4·25 문화회관에 나와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 김정일 위원장도 당연히 1차 때와는 다른 차분함의 모습이었다. 반세기 동안 적대와 대결을 지속하던 남북의 양 정상이 극적으로 순안공항에 직접 대면한 것은 그 자체로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흥분이었고 감동이었다. 당연히 포옹과 환한 웃음이 절로 나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 지속된 남북관계는 김 위원장에게도 정상회담이 흥분할 일보다는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여졌다. 양 정상의 만남인 만큼 예의를 다해 대대적인 환영식은 준비하지만 김 위원장 개인에게 1차 때와 같은 감동과 흥분이 덜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홀대가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정상적 환영식이었다.

* 방북의 백미는 북측 사람과의 만남

평양 방북의 백미는 뭐니 뭐니해도 북측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일정에 따라 참관지를 둘러보며 북쪽 사정을 접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에는 비할 수 없다. 이번 방북 목적이 정상회담 수행임을 감안하면 회담 본연의 입장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북측 사람과 만나 논의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한 일이리라.

김정일 위원장은 도열한 특별수행원 모든와 일일이 악수하는 '파격을 보였다.
	남북정상들이 인민군의 사열을 받고 있는 뒤쪽으로 김근식 교 수  등 특별  수행원들이 도열해있다.

이번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북측은 대남 사업 일꾼들이 총 출동한 듯했다. 도라산 북측 CIQ를 지나자 바로 구면인 인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양을 몇 번 오가며 안면이 익숙한 안내원들이었다. 이미 평양을 오가며 친하게 지냈던 북측 인사들을 만나는 재미도 적지 않았다.

정상회담 기간 중에 필자가 머문 보통강 호텔에서는 오랜 친구 리동혁 선생을 만났고 지난 5월 평양방문에서 친해진 박철룡 선생도 볼 수 있었다. 리동혁 선생과는 평양뿐 아니라 북경에서도 만나 회포를 푼 적이 있었고 박철룡 선생과는 고려호텔에서 격의 없이 폭탄주를 돌린 적도 있었다.

여느 때처럼 호탕하고 친근한 이들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필자가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이라는 갑자기 높은(?) 지위로 와서 그랬는지 전보다 훨씬 정중하고 깍듯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친절하고 재미있고 예의 바른 것은 여느 때와 같았다.


* 최승철 부부장 “경공업만 세워준다면 폭탄주 100잔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 외에도 이번 정상회담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새로운 만남을 가지는 의미도 있었다. 첫날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필자가 앉은 테이블에는 통일전선부 최승철 부부장이 자리를 같이 했다.

대남 사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이번 정상회담의 시작과 끝을 실무적으로 책임진 최 부부장은 활달한 성격의 애주가였다. 동석했던 로만손 시계 김기문 사장에 대해 자신이 직접 개성공단에 가서 김 사장 회사를 봤다면서 그런데도 시계 하나 선물하지 않는다고 밉지 않은 투정을 부렸다.

옆에 앉았던 신발 회사 태광실업의 박연차 사장이 술을 권유하자 최 부부장은 ‘우리 경공업만 추켜 세워준다면 폭탄주 100잔이라도 먹겠다’며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경협을 통한 북한경제의 회생 의지를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마지막 날 환송오찬엔 북측의 고위급 인사만 참석했다. 주로 당과 군, 내각과 대남사업 분야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1차 때 환송오찬과 다른 점은 내각 인사로서 김영일 총리와 로두철 부총리가 참석했다는 것이고 이는 이번 합의문에도 드러나듯 북이 남북경협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는 의미였다.

우리 테이블엔 리종혁 아태부위원장과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함께 했다. 박재경 부부장은 인민군 대장으로서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 가장 자주 동행하는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현지지도 3인방 중 그날 오찬엔 박재경 대장과 리명수 대장이 참석했다.

남쪽에겐 무시무시한(?) 인민군 실세 대장으로 비쳐지지만 정작 그 날 만나본 인상은 정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였다.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안주가 새로 왔으니 술을 해야 한다며 연거푸 건배 제의를 하곤 했다. 단숨에 잔을 비운다는 북한 표현으로 ‘쭉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기원도 재밌게 설명해줬다. 2박 3일 동안 만난 북측 사람들은 모두 밝고 재밌고 순수해 보였다.

* 김정일 위원장, 빈틈없는 업무파악능력 과시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기 때문에만 가능한 새로운 경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정일 위원장과의 직접 대면이었다. 첫날 환영식에서 필자는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악수하는 행운(?)을 누렸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렬로 도열한 특별수행원 모두와 일일이 악수하는 파격을 보였기 때문이다. 1차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환송 오찬에서는 좀 더 가까이 긴 시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화원 초대소에서 열린 오찬에는 배속김치와 비둘기철판구이 등 맛보기힘든
	음식들이 선보였다.
<사진은 북측 안내원과 함께한 김근식 교수>

백화원 초대소에서 열린 오찬은 매우 화려하고 훌륭했다. 그날 메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배속김치와 비둘기철판구이였다. 남쪽에서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고급스러운 오찬은 남측 대표단을 진정으로 환송하는 의미였지만 필자에게는 자꾸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쳐지면서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주탁에 앉아 환담하는 김 위원장은 거침없이 와인을 마시고 멀리서도 들릴 정도의 카랑한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기도 했다. 참석한 남측 인사 모두와 일일이 건배하며 인사하기도 했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건강 이상설은 필자가 보기에 근거 없어 보였다.

* 김 위원장과 악수한 ‘접견자’ 신분 특별 대우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고 함께 식사를 한 필자는 이제 ‘접견자’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북에서 접견자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북측 안내원들은 김 위원장과 악수한 필자의 손을 보자며 신기해했고 백화원 초대소 오찬에 초대받은 필자를 매우 부러워했다.

여전히 북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막강한 권위와 지배력을 갖는 유일 영도자이다. 정상회담 기간 내내 김정일 위원장은 최고지도자의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챙겨야 할 사안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업무 파악능력을 보였다. 환송 오찬장에서 올림픽 단일팀을 구성해야한다는 남측 인사의 끈질긴 부탁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그건 양측 선수의 기량과 전력차가 커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정확히 사안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남측 대표단을 맞이하기 위해 북측은 많은 공을 들인 듯 했다. 바로 얼마 전 엄청난 수해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에서 오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평양은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건물도 밝은 색깔로 칠해져 있었고 도로 곳곳은 구석구석 청소되어 있었다.

항상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평양의 전기사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번 정상회담 기간 동안 평양의 밤 모습은 필자가 다녀본 중에 가장 환하게 밝았다. 작정을 하고 전기사정을 자랑하고 싶었던지 첫날 김영남 상임위원장 주최 만찬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북측 안내원이 먼저 나서서 평양 야경을 감상하라며 시내 한바퀴를 일부러 돌기도 했다.

도로 가로수 위에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불꽃을 밝혀놓기도 했다. 평양의 전기를 책임지는 동평양 화력 발전소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전기 공급을 충분히 한 것도 있겠지만 최근 북한의 경제 사정이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 북 주민 밝아진 얼굴서 나아진 경제사정 확인

연도에 나와 환영을 하는 평양 시민의 모습도 과거에 비해 화사하고 밝은 옷차림이었다. 신발도 각양각색이었다. 국가가 공급하는 획일적인 신발 대신 시장에서 산 질 좋은 신발이 많이 보였고 특히 눈에 띈 것은 젊은 처녀들이 키를 높여 보이기 위해 굽높은 운동화를 많이 신고 있는 점이었다. 보통강 호텔의 북측 복무원과 우리가 참관한 곳의 안내원 그리고 만찬장과 오찬장의 접대원들 모두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북측 주민들 얼굴에서 경제사정이 나아진 결과를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상회담 기간중 확인한 평양시민들의 모습도 과거에 비해
	화사하고 밝은 모습이다.

핵문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린 탓에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정상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2002년 시행된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의 효과가 지금의 나아진 경제상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장을 인정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짐으로써 시장경제는 아니지만 시장원리가 일정하게 허용되었고 각급 공장과 기업소에서도 계획량 이외 초과생산물은 시장에 내다팔아 이득을 볼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로써 주민들은 너도나도 ‘실리’를 찾아 장사에 나서게 되고 기업소도 재량껏 원가를 줄이고 판매량을 늘려 이른바 ‘번수입’을 높이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실리와 번수입이 지금 북한의 경제 활성화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7·1 조치 이후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확대되고 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선군과 일심단결의 구호가 지배하고 창의와 자율보다는 지시와 규율이 앞서고 있다. 경제적 변화의 필요성과 정치이념적 지속의 고집 사이에서 북한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절대 권위자 김정일 위원장의 선택에 의해 주도되는 변화일 수밖에 없다. 우선 경제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현존의 정치시스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평양은 여전히 딜레마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