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태안, 늘어난 현수막이 먼저 맞았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글귀에서부터 삼성중공업에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과 대책을 따지는 문구, 생계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수 많은 요구가 찬 겨울 바람 속에 소리 높여 펄럭이고 있었다.
허베이스피리트호 원유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50일. 자원봉사자와 주민, 민관군이 모두 나서 겉에 보이는 기름띠는 대부분 걷어 냈지만, 모래자갈 속 깊이 스며든 기름 흔적처럼 주민들의 상처와 시름은 여전히 깊었다.
25·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서해안 관광살리기 일환으로 자원봉사자와 ‘국내관광활성화위원’ 등 230명과 함께 태안을 찾았다. 25일 구름포에서 기름제거 작업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은 신진도 안흥항에서 하루 밤을 묵고 이튿날 유람선, 자연휴양림, 고남패총박물관 등을 찾았다. 이들과 함께 유람선 안스타호에 올랐다.
태안은 검은 기름 해안을 하얗게 뒤덮었던 희망의 인간띠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가 고사리손으로 기름 방울 하나하나 걷어냈던 정성만큼 변함 없이 찾아주고, 놀아주고, 팔아주고, 먹어주고, 사랑해주기를 태안은 진정 바라고 있었다. <태안=손혁기>
전국에서 유일한 유람선 여성 선장인 안스타호 박은서 선장. 50일만에 관광객을 맞아 자원봉사자의 노력으로 제모습을 찾은 태안의 비경을 소개했다.
26일 아침 태안 신진도 안흥항 유람선 선착장. 전국에서 유일한 유람선 여성 선장인 박은서 선장이 398인승 관광유람선 안스타호에서 환하게 승객들을 맞았다.
“바다가 좋아서 뭍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선장이 됐어요. 처음에는 한강, 목포 유람선에도 여성 선장이 있는데 다들 퇴임하고 이제는 저 혼자라나 봐요. 서해안이 지저분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 나가보면 달라질 겁니다.”
박 선장은 14년 동안 배를 몰았다. 승객들에게 태안의 비경을 좀 더 잘 알리기 위해 문화해설사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하고 50일 동안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아니 배를 띄웠지만 태안의 비경을 뽐낼 수는 없었다. 그 동안 자원봉사자들을 섬으로 날랐기 때문이다.
50일 만에 다시 제 일을 찾은 박 선장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유람선이 항구에서 출발하자 괭이 갈매기가 뒤따랐다. “가의도 일원은 천연기념물 제334호 괭이갈매기 번식지입니다. 원유유출 사고 나고 제일 많은 갈매기가 따라 오는 것 같네요. 갈매기 밥을 사서 밖으로 나가보세요.”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 이후 처음으로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에 과자를 먹으려는 괭이갈매기들이 따라왔다.
선장의 말에 겨울바람을 피해 객실에 있던 승객들이 우르르 유람선 뒤로 몰려 나갔다. 50일만에 관광객을 환영하듯 100여 마리의 괭이갈매기들이 안스타호를 뒤따랐다. 새우깡을 던져주자 뒤따라 오던 괭이갈매기가 빠르게 낚아챘다. 용감한 녀석들은 손에 든 새우깡을 채 갔다.
배가 바다로 나가자 박 선장의 10여년 경력이 녹아 났다. 사진 배경이 잘 나온다는 독립문 바위, 뭍의 나무들이 뽑힐 만큼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다는 촛대바위의 소나무, 마술처럼 나타나는 거북바위, 남편바위·여자바위에 얽힌 전설들과 섬을 지날 때는 그곳 주민들이 해초를 따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사이사이 육쪽마늘, 자연산미역 같은 특산물도 끼워 지역경제를 살리려는 상술도 녹여 냈다.
유람선 주변 바다에는 기름기 하나 보이지 않았고 해안가도 대부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섬 일부 바위틈에 낀 검은 흔적이 기름유출 사고가 이곳에서 벌어졌음을 알려줬다.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두 번째로 빠른 ‘관장수도’입니다. 커다란 불덩이가 물을 끓이는 것처럼 부글거립니다.” 바다 밑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물을 끓인다는 표현에서 박 선장의 관록이 엿보였다.
유람선이 출렁거리며 ‘관장수도’를 지나 코바위에 다다르자 가마우지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박 선장은 “몸은 둔해서 높이 날지는 못하지만 날쌔게 바다 속으로 잠수해 수심 10여 미터 아래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며 보지 못한 광경도 관광객의 기억 속에 편집해 줬다.
‘유람’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어선의 어부들과 항구에서 낚시를 하던 ‘꾼’들도 관광객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줬다.
어선에 탄 어부들과 안흥항에 낚시를 하러 나온 관광객들이 유람선에 손을 흔들어줬다.
박은서 선장은 배를 떠나는 관광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이제 바다는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기름유출로 오염됐던 바다라는 생각보다는 멋진 관광자원들이 많은 곳이라는 기억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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