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년대 대학가를 주름잡은 민족해방계열(NL) 운동권 학생들에게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왜냐고 묻는 신입생들에게는 ‘우리나라 군대는 미국놈들의 지휘를 받고 있는 양키의 용병’이라는 즉답이 주어지곤 했다.

공교육 12년 경력이나마 나름은 자신만만했을 신입생들도 이쯤 되면 고민이 아니될 수 없다. 이내 선배들을 따라 길거리로 달려나갔을 몇몇은 아마도 가슴이 무척 뜨거운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학생운동이 대단했던 당시, 신문지상에서 ‘의식화’라는 단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의식화란 이처럼 선배의 설익은 이념과 후배의 뜨거운 가슴이 만나면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2006년 우리는 전혀 새로운 버전의 의식화를 목격하고 있다. 외진 강의실의 낡은 문건이 아니다. 수많은 친정부 매체들이 실시간으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교사 또한 더 이상 형형한 눈빛의 말라깽이 선배들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국방부장관이다. 연일 “전시 작통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소리 높인다.

국민된 자로서 어느 누가 자주(自主)를 마다 하겠는가? 자기 힘으로 자기의 안위를 지키는 자주국방의 ‘레토릭’ 앞에서 가슴 뜨거워질 사람이 어디 열아홉 대학 새내기들 뿐이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정확히 이 지점, 국민들의 뜨거운 가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권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정권은 전작권 환수가 과거 정권에서 줄곧 추진된 것이 때문에 보수나 진보로 갈릴 사안이 아니라며 자신들의 ‘이념적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93년의 북핵사태가 당시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전작권 환수논의를 전격 중단시켰던 사실은 무시한다.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미사일 발사까지 겹친 지금의 국면이 93년 당시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텐데, 느닷없이 전작권 환수를 밀어붙이는 이유를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갈구하는 이념적 무죄는 이 대목에서 짙은 ‘혐의’로 바뀌고 만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따른 비용도 큰 문제다. 도대체 얼마의 혈세가 투입되어야 정권이 주장하는 자주국방이 될지 아는 국민이 없다. 정부가 마련한 중기계획이나 보도 등을 살펴보면 2012년까지 151조원은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재원 마련도 문제이거니와, 과연 이토록 막대한 국방비 지출이 바람직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우리에겐 지금 선진국 도약과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국정과제들이 즐비하다. 하나같이 ‘돈 먹는 하마’들이다. 국민들 허리는 이미 휠대로 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국정의 최우선순위가 자주국방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이 요구하는 것은 한 마디로 평화군축이다. 미사일을 쏜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맹폭을 받는 것도 바로 이 흐름에 역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자주국방을 하겠다고? 우리가 수천억하는 첨단 무기를 사들이도록 방관하고 있을 중국이, 일본이, 그리고 북한이 아니다.

평화야말로 가장 확실한 안보이고 군축은 가장 저렴한 자주국방이다. 평화군축의 실현을 위한 선결조건은 북한이 자칫 오판하거나 딴 궁리를 하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이다. 한미동맹의 강화가 시급한 판국에 한미동맹의 약화 내지는 해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전시작통권 환수 문제를 서두르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익과 한반도 정세의 안정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자주국방에 대한 미련은 접고 훗날의 과제로 유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20%도 안되는 한심한 지지율의 정권이 서둘러 처리할 만한 사안은 더더욱 아니다. 다음 정권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 호시우행(虎視牛行) 할 일이다.

전시작통권이 없으면서도 자주의 결핍을 아파하기보다는 동맹의 이점을 최대화할 줄 아는 나토 회원국들의 당당함에서 필자는 21세기의 실리주의 외교노선을 본다. 그러나 세계 최강 4개국의 힘이 충돌하는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에서 출몰한 자주국방론을 보노라면 왠지 80년대  어느날 캠퍼스의 으슥한 강의실이 떠오른다. 그래서 불안하다.

              

2006. 8. 17 국회의원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