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하얀 눈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즐거웠던 추억들보다는 마음을 아리게 하였던 기억들이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되살아난다. 그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세월과 함께 익어지니, 감미로움이 배어난다. 은은함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내 고향 고창(전라북도)은 눈이 참 많은 곳이었다. 눈이 한번 내리면 끝이 없었다. 눈을 치우는 일은 언감생심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만을 내는 것도 힘들고 어려웠다. 그 곳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였던 일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참을 수 없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일요일(07년 1월 28일)이어서 시간이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향으로 달려갔다.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설경이 산란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겨울 풍광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정겨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고향을 찾아간다는 마음이 보이는 것마다 흥겨움이 넘쳐나게 만들고 잇는 것인지도 몰랐다.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낯설다. 어린 시절의 친구나 동창 녀석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녀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전화에 응답하는 녀석은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하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야 ! 털보가 되었네.”

  “친구, 반가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더욱 더 다정하게 보인다. 턱수염은 기르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기를 수 없다. 사회생활이 그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는 그런 제약을 초월해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친구의 안내로 깊은 산속의 음식점으로 향하였다. 고향이 아니면 절대로 찾아갈 수 없는 은밀한 곳이었다. 거기는(성송면 암치) 고향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염소를 비롯하여 닭과 오리 그리고 칠면조들을 방복으로 키우고 있는 곳이었다. 하얀 눈을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친구는 도인이 다 되어 있었다. 욕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는 말 또한 자유자재하고 있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아진 시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삶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온 몸에서 배어나고 있었다.

  내려놓고 삶을 즐기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이상의 나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유년시절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마시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실감하게 된다. 무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털보 친구가 부럽다. 이런 친구를 가지고 있어 행복하다. 고향은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春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