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그 만큼 교육정책을 세울 때는 신중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일각에서 ‘대학별 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등 공교육 정상화 3원칙 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 3원칙 정책이 대학의 경쟁력,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력 향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들 폐지론자들은 선진 외국의 경우를 들어 3원칙 정책이 마치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인양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검증 차원에서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있는 한국대사관 주재 홍보관들과 현지 전문가들을 통해 선진 외국의 교육개혁과 고등교육 발전방향에 대해 살펴본다.<편집자주>
요즈음 독일 사회에서도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움직임이 활발하다. OECD 가입국가들의 청소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조사, 일명 PISA 조사에서 독일의 학생들이 계속 하위권에 속하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전반적 학력수준 저하에 따른 중등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은 또한 독일의 대학들이 미국, 영국의 대학에 비해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와 교육계는 어떻게 논의하고 준비하는지 교육계 인사와 학부모를 만나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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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과 직업 교육의 조기분리로 계층간 분리 현상이 뚜렷해지자, 독일은 핀란드처럼 종합학교제도를 도입했다. <베를린 자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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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교육 개혁정책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만난 오덴발트 교육청 게르하르트 마이어(Gerhard Maier) 청장은 한국에서는 현행 교육제도가 학생들의 학력수준을 저하시키고 대학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PISA 상위 한국은 독일 교육계 선망의 대상
PISA 연구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며 독일 교육계의 선망을 받고 있는 한국의 교육이 비판을 받고 있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고교 평준화제도 폐지 등을 거론하고 있다는 말에 그는 커다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독일 교육계도 오랫동안 이와 유사한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이른바 ‘종합학교(Gesamtschule)’를 둘러싼 논란이지요.” 마이어 청장은 독일의 교육제도를 간략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독일의 의무교육은 만 6세부터 18세까지이며, 학비는 물론 교재비도 전액 국가에서 지원하고 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대부분 4년제(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주만 6년제)이며 대학에 진학할 학생과 직업교육을 받을 학생을 이미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서 조기 분류한다. 이때 담당 교사가 학생의 적성과 능력을 고려, 부모와 상담을 거쳐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에 자녀의 진로 결정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발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조기 분류가 몇몇 교육개혁가로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다고 게르하르트 마이어 교육청장은 말했다.
“현 독일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진로를 조기에 결정하고 분리 교육함으로써 오히려 학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전반적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조기 분리 교육이 국가적으로는 계층간 융합을 해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고교평준화제도가 독일 종합학교 지지 근거
마이어 교육청장은 일례로,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김나지움’ 입학자들의 경우 그들 부모 역시 대부분 ‘김나지움’을 나온 반면, 실업계 고교인 ‘레알슐레’와 ‘하우프트슐레’ 진학자의 경우 이들 부모들도 실업계 고교를 졸업했다는 통계 조사를 설명했다. 말하자면 조기 분리 교육이 계층간 분리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업제도가 역사적으로 정착된 독일에서는 학력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적다는 사실 또한 감안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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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시험에 통과한 학생은 원칙상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든지 입학할 수 있다.<훔볼트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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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가 바로 ‘종합학교’이다.
1960년대 중반 독일은 교육의 현대화와 계층통합을 통한 사회적 저의 실현을 모토로 ‘종합학교’를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기존의 실업계학교와 인문계학교를 통합 운영하여 우수한 학생과 평범한 학생들을 상당기간 함께 교육시킴으로써 학업에 대한 동기유발을 지속적으로 유도하고 가능한 한 많은 학생들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자는 것이지요. 더불어 서로 다른 사회적 계층에 속한 학생들이 더 자주 더 깊게 서로 접촉하면서 계층간 이해를 심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이야기되곤 합니다.”
독일 교육계는 종합학교에 대한 찬반을 놓고 아직 논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최근의 저조한 PISA 결과는 교육개혁과 연관되어 이 같은 논란을 더욱 촉발시켰다. 종합학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PISA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한국의 고교평준화제도는 주요 논거 중 하나이다.
사회적 배경·교육 시스템이 다른 점 감안해야
“PISA에서 수위를 차지한 핀란드가 종합학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 교육계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같은 제도라 할 수 없지만 한국의 고교평준화제도 또한 종합학교 지지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요. 물론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점과 전체 교육시스템이 다르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을 보이고 있으며 사교육비 지출이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죠.”
사교육비 이야기가 나오니 독일 학부모들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아들 마쿠스가 10학년이 되고 곧 대학입학자격시험(아비투어)을 치러야 할텐데 영어 성적이 신통치 않았어요. 고민 끝에 영문과 대학생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방과후 보충수업을 받게 했지요”라고 올해 뮌헨 공대에 입학한 아들을 두고 있는 멜라니 미트너 부인은 말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사교육비에 얼마나 지출했는지가 궁금했다. 조심스러운 물음이 무색하게 미트너 부인은 “다행히 아이가 학교공부를 잘 따라온 편이라 영어 과목이외에는 보충수업을 시킨 적은 없습니다. 영어선생에게는 시간당 10유로를 지불했어요”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영문학과 학과 비서를 통해 부탁하거나 대학의 학생생활지도소를 통하면 쉽게 원하는 선생을 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조언하는 모습이 여느 한국 학부모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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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우리나라의 BK21사업처럼 우수대학 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해 대학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독일의 대학강의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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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상상도 할 수 없다”
대학 입학을 위한 자격시험인 아비투어는 김나지움 마지막 2개 학년(12~13학년) 내신성적과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성적을 합산, 평균해 점수를 결정한다. 아비투어 시험은 각 주 교육청의 승인에 의해 각 학교별로 실시하고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아비투어 시험에 통과한 학생은 원칙상 전국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든지 입학할 수 있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오덴발트 교육청장은 “독일 대학은 별도의 입학시험을 시행하지 않으며, 고등학교 졸업시험격인 아비투어에 합격하면 독일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정 학교나 특정 지역에 가산점을 주는 경우도 없습니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든 아비투어를 통과한 고교졸업자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없는 독일에서 기여입학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든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이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현실이 언제나 원칙을 따르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 약학, 치의학, 법학 등 이른바 인기학과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리기 때문에 언제나 입학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고 과도한 입시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학생선발 업무를 수행하는 전국적인 공공기관(ZVS)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이어 청장은 독일의 대학입학절차에 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늘어 놓았다.
소수 엘리트 대학 위해 교육체제 전반 흔들 수 없어
우리말로 번역하면 ‘학생정원 배분중앙기관’이라는 복잡하고 긴 명칭을 가진 기관인 ‘Zentralstelle fur die Vergabe von Studienplatzen’(약칭 ZSV)는 아비투어를 통과한 전국 고등학교 졸업자 중, 소위 정원제한학과(Numerus Cluasus)에 지원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대학지원서를 접수받아 전국 각 대학에 학생들을 배정하고 있다.
이 기관에서는 아비투어 성적 20%, 대학입학 신청 후 대기시간 20%를 감안하고 나머지 60%는 대학의 자체 평가 기준에 따라 학생을 선발토록 했다. 대학 자체 평가기준의 비중을 중시하여 학생선발에서 대학에 자율성을 존중하고 있으면서도 각 대학별 입학시험이 아니라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대학입학자격을 부여함으로써 과도한 입시경쟁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입학 절차를 통해 교육의 평등권을 실현하고 대학의 전반적 평준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반면, 교육평등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영미권 대학들에 비해 독일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말하자면 영국의 캠브리지, 옥스퍼드 대학이나 미국의 하버드, 예일 등의 명문대학과 견줄 만한 독일 대학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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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육 정책의 핵심에는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교육기회평등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독일 훔볼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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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생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교육받을 권리를 중시하는 독일의 대학입학절차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에서처럼 이른바 엘리트 대학이라고 할 만한 대학이 없다는 비판은 수긍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육의 목적을 오로지 엘리트 양성에 두는 듯한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른바 엘리트 대학을 위해 소수의 학생만을 선별하는 선발절차를 도입하는 것은 독일 교육체제 전반을 흔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마이어 청장은 교육평등권을 중시하는 독일 교육제도의 근본이념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내비쳤다.
우수인재 양성할 수 있도록 대학 지원
“이번에 아들이 들어간 뮌헨 공대가 '미래육성 대학'으로 선정되어 5년간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게 됐다는데, 아들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제 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어떤 인물로 성장하게 될까 은근히 기대도 되구요” 올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둔 미트너 부인의 은근한 아들 자랑이다.
독일정부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화사회로의 변화를 선도하고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교육과 연구 혁신을 국가의 최우선과제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의 ‘두뇌한국(BK)21’과 유사한 'Excellence initiative' 프로그램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몇 개 대학을 우수대학으로 선정하여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5년동 막대한 규모의 재정지원을 실시함으로써 해당 대학의 연구능력과 국제경쟁력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우수대학으로 선정되기 위한 독일 대학들간의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대학경쟁력을 전반적으로 제고시키는 효과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낳고 있다.
이러한 우수대학 지원프로그램은 대학이 미리부터 우수인재를 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학습능력을 갖춘 학생들 가운데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대학을 지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물론 이 지원정책의 실시를 두고 한편에서는 우수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뿐만 아니라 학생선발권을 일임토록 해야 한다는 좀 더 급진적인 개혁제안을 내놓기도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우수 대학 지원프로그램이 독일 대학이 처해있는 고질적인 재정난을 미봉하는 것에 불과하며, 독일의 교육전통을 파괴하고 불필요한 경쟁만을 유발할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저런 변화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육 정책의 핵심에는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교육기회평등의 사상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동등한 교육기회 보장과 경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독일의 노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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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121212@dau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