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6·10항쟁이 20주년을 맞았다.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를 외치던 시민들의 함성은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냈고, 그 날 그 거리에서 뿌려졌던 민주주의의 씨앗들이 지난 20년간 무럭무럭 자라 성년의 나무로 성장했다. 몇 차례의 선거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사라진 특권과 권위주의의 자리에서 민주적 질서와 가치가 새롭게 움을 트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교체되지 않는 권력의 특권이 남아있고,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에 양극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남북관계의 질곡을 넘어선 새로운 평화체제의 구현도 풀어야 할 숙제다.
지금의 우리를 긍지 속에 살게 한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장과 복지가 함께 하는 더불어 잘 사는 나라, 화해와 타협이 존중되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나라,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편집자>
2006년 9월 11일 이상수 노동부장관,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이수영 한국경총회장, 손경식 대한상의회장, 조성준 노사정위원장이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날 노사정은 직권중재제도 폐지, 대체근로 도입 등 노사관계 제도를 국제규범에 맞게 하는 등 노사관계 선진화에 기틀을 마련했다.
비록 마지막 합의 단계에서 노동계의 한 축인 민주노총이 반발하고 뛰쳐나갔지만 그동안 입법강행, 노조 파업 등 개정 때마다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던 노사관계법을 노동자, 사용자, 정부가 대화를 통해 마련한 것은 이날 노사정 대타협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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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타협을 통해 노사관계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한 2006년 9월 노사정 대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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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보다 어려운 노동법 개정을 대화로 풀다
헌법보다 개정보다 더 어렵다는 노동법 개정이 파국을 피하고 대화와 양보로 합의점을 찾아낸 것이다.
노동법개정과 노사정 합의 과정에는 10년을 주기로 뚜렷하게 달라진 우리 사회의 성숙도가 그대로 나타난다.
1987년 민주화 봇물이 터지자, 노동현장에서는 민주노조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6월 항쟁을 통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처럼 민주노조도 투쟁을 통해 건설됐다.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과정을 전한 노조기관지는 당시 한 단면을 보여준다.
“최선봉에선 오토바이 15대. 마이크가 설치된 1톤 트럭 선두차, 안전모, 방진마스크, 보안경으로 단단히 무장한 5백여 건장한 노동자 부대, 소방차 2대, 10톤 덤프트럭 등 중장비 부대, 4만여 노동자와 가족들. 지도부의 통제에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시내로 힘차게 진군하는 우람찬 노동자 시위대 … 무장전경은 직격최루탄을 미친 듯이 쏘아댔지만 노동자 앞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꼬마병정에 불과했다.”- 민주노조 8월 30일자.
노조 결성과정은 마치 전쟁처럼 적과 아군의 치열한 대결이었다. 사측은 어용노조를 급조해 노조결성을 방해했고, 노동자들은 파업과 투쟁으로 이에 대항했다. 노사정의 관계에 대화와 타협이 자리할 공간은 없었다.
민주주의는 투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6년 4월. 대통령의 '신노사관계' 구상으로 노사관계 개혁 작업이 시작됐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의 첫 실질적인 사회적 대화창구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도 출범했다. 하지만 과정은 2006년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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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탄압과 저항의 적대적 관계. 울산 현대엔진 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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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노사간 합의에 실패하자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개정안을 여당이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했다. 일방적 결정은 반발을 낳았다. 노동법 협의로 시작됐지만 노동자 뿐만 아니라 시민까지 참여하는 ‘노동법 대투쟁’으로 불이 번졌다. 결국 날치기 처리된 노동법은 철회됐고 여야가 재개정안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6년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진전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라는 대화 체제를 이끌어 냈지만 노사정 모두 대화로 사회를 변화하고, 제도화하는 방법에 미숙한 셈이었다.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 얻어지지만 투쟁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6월 항쟁 20년,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대화와 타협, 화해와 포용이 투쟁의 자리를 대치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표류해온 원전센터가 경주로 부지를 선정하고, 15년 넘게 논란을 빚은 새만금 간척사업 논란이 종식된 것이 대표적이다.
끈질긴 대화노력으로 수십년 난재 해결
정부는 1984년 ‘방사성폐기물관리 기본원칙’을 확정하고 원전센터건립을 추진했다. 그동안 국책사업은 국가가 선정하고 집행하면 되는 일방통행이었다. 반항하면 밀어내고, 주장은 묵살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봇물이 터지면서 각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정부가 경북 울진, 영덕, 영일 등 3개 지역을 방폐장 후보지로 선정했지만 주민의 반발로 중단됐다.
1990년 정부는 ‘서해 과학연구단지’라는 명칭으로 안면도에 방폐장 건설을 검토하다 들통이 난다. 이 사건으로 과학기술처 장관까지 사퇴하지만 1992년에는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또 다시 주민을 회유하다 주민의 반발을 샀다. 정부도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대화하기보다는 가리고, 숨기고, 속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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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을 표류한 원전센터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유치시설로 거듭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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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주민의 자발적 선택을 중시하는 유치공모제를 도입했지만 이번에는 부안군이 지역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유치신청을 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2005년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추진할 것을 천명하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자 혐오시설로 치부되던 원전센터를 유치하겠다며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경쟁을 벌였다.
결국 19년을 표류해온 원전센터는 억압과 배제를 미뤄내고 대화와 타협이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밖에도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와 새만금 방조제 사업도 정부의 끈질긴 대화와 설득, 법적 절차를 통해 말끔히 해결됐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문을 연 이 땅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억압과 배제를 밀어내고 대화와 타협의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6·10항쟁 20년, 우리사회의 대화방식을 말한다
◇ 인터뷰 - 신철영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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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영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사무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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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정부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이곳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신철영 사무처장의 삶은 6·10항쟁 이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 대화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민주화의 길을 연 1987년 6월 그는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있었으며, 시민 참여 제도를 정비한 1990년대에는 시민운동단체인 경실련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수십년 된 난제를 풀어 협치가 자리 잡을 무렵에 국민고충처리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신 사무총장은 우리 사회의 대화방식을 권위주의 시대의 탄압과 저항, 민주적 제도 보완시기의 외면과 탐색, 민주화 성숙기의 대화와 합의의 시기로 구분했다.
투쟁의 노동현장 · 참여의 시민단체· 화합의 옴부즈만기구에 몸담다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복역한 신 사무총장은 “당시 극히 소수의 민주세력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박살내려고 하다 보니까 정권의 최대 적처럼 여겨져 실상 갖고 있는 실력보다 영향력이 커졌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민주세력의 저항이 영향력을 키우는 적대적 공생관계인 셈이다.
1987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던 신 사무총장은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실제로 달라졌다고 느낄 수 없었다. 정부와 민주화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그해 신 사무총장은 두 번이나 복역했다. 권위적인 정부와 저항하는 민중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2년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과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정통성을 획득하는 변화의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국민의 대화방식도 달라져야 했다. 반정부 투쟁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적 요구를 제시하는 ‘목적주장’, ‘당위적 주장’을 하는 환경에서 미흡하지만 대안을 내놓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이 이 마련된 것이다.
1994년 신 사무총장은 시민운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대안 제시다. 100점이 안 되는 대안이라도 내놓고 토론을 하면서 주고받아야 세상이 조금조금 달라질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민과 정부를 가로막았던 두꺼운 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신 사무총장은 “당시 시민단체 분위기는 대화하러 가서 ‘내가 거기 가서 다 이야기하고 왔다’고 말하면 ‘잘 싸웠다’고 평가하고, 조금 양보해서 합의점을 찾으면 ‘저 친구 맛이 갔네!’하는 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경직된 사고로 서로 장점을 취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대화가 불가능한 셈이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신 사무총장은 “정부도 시민단체가 전적으로 지원하는 자신들의 들러리가 되기를 바라 벽을 키웠다”고 말했다.
독단적인 100점보다 합의한 70점이 사회를 바꾼다
정부는 여전히 독점적으로 정책결정권한을 행사했고, 시민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환경, 여성, 교육,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주적 요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정부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와 시민사회가 만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씨앗도 자랐다. 조금씩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신뢰도 쌓였다. 신 사무총장은 “도장까지 찍을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른쪽으로 얼마 왼쪽으로 얼마 하면 합의는 못해줘도 용인하고 넘어갈 수 있는 합의의 선을 찾는다”고 말했다.
신 사무총장은 시민단체 활동을 정리하고 2004년부터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발을 들여놨다.
신 사무총장은 이제 대화가 갈등해결을 넘어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역할 하기를 희망했다. “보수와 진보가 이야기 하는 것이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그들 간에 공통분모가 있다.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립되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공정한 환경을 조성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 경쟁을 할 수 없는 취약계층을 사회가 돌보는 문제는 누구나 같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신 사무총장은 “100점이 안되는 대안이라도 내놓고 토론을 하면서 주고받아야 세상이 조금조금 달라질 수 있다”며, "서로 강조가 조금씩 달라도 합의점을 찾아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 사회적 에너지를 모아가자”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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