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같으면 골프장 하나 허가 받으려 해도 중앙정부에서 도장을 찍어줘야 했습니다. 이미 그 권한은 시·도로 넘어간 지가 아주 오래 됐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중앙정부가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방분권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중 일부다.

대통령의 지적처럼 과거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은 서울 출장이 잦았다. 주민 서비스를 개선하려고 자치단체에 새 기구를 만들거나, 정원을 늘리려면 행정자치부의 ‘결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자치단체의 조직·정원뿐만 아니라 지방교부금, 양여금, 보조금 등 지방살림의 중요한 예산이 행자부를 통해 집행되거나 전달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찰이 잦았다. 중앙정부는 ‘원칙론’을 앞세우고, 자치단체는 ‘현실론’을 내세워 권한다툼을 벌였다. 중앙정부는 형평성 있는 법과 제도를 강조하고, 주민들에게 더 나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자치단체는 이를 간섭과 통제로 받아들였다. 자치단체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들어 이 같은 풍경은 상당부분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지방 공무원들이 결재 받으러 서울로 올라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자치단체의 조직과 인력에 관한 행자부의 사전 승인권이 전면 폐지됐다. 대신 ‘총액인건비제’가 도입됐다. 이 제도는 자치단체가 주어진 예산규모 안에서 자율적으로 조직을 바꾸고, 인력을 줄이고 늘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중앙의 행정혁신이 지방으로 이어진 결과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조직과 인력운용 폭을 넓혀 줌으로써 자치단체가 주민들에게 더 나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의 권한을 내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복지 서비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조직 및 인력 개편 등 자치단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조직·인력 사전승인권 폐지와 총액인건비제 도입은 지난 4년간 광범위하게 이뤄진 지방분권이 맺은 결실 중 하나다.

지방분권은 참여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다. 선진형 분권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자립역량을 바탕으로 지역 하나하나가 성장의 동력이 돼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위해 지역의 혁신주체로서 자치단체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대폭적 권한이양과 지역 주민 참여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지방분권이 포괄적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2006년 9월 기준으로 중앙정부가 관장하던 권한와 사무 816건이 지방정부로 넘겨졌다. 지방교부세율은 14%대에서 19%대로 높아져 지방자립도를 높였다. 교육자치제도, 주민소환제·주민투표법 등 주민참여 방안도 입법화 됐다.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 탈바꿈해 지방자치의 모델로 성장했다.

행자부 자치분권제도과 이길영 사무관은 “지방분권은 역대 정부에서도 꾸준히 이뤄진 정책과제이지만, 참여정부의 차이점은 조금씩 나눠주기보다 법을 만들어 권한을 통째로 이양하고, 지방자치 단체에 주민의 비판과 감시가 가능하도록 통제시스템을 갖춘 것”이라고 밝혔다. 지방정부에 대한 권한이양이 단위사무 중심에서 지역개발, 사회복지, 환경, 도시계획 등 주민생활과 밀접한 기능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이양으로 이뤄졌음을 뜻한다.

■ 지방분권 시작과 성과…47개 과제 중 30개 마쳐

지방분권은 시대적 흐름이다. 이미 중앙정부가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조정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사회적 변화는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다양한 사회환경 변화에 따른 신속한 대응과 조정, 주민복지와 생활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는 주민 바로 곁에 있는 자치단체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과거 중앙정부 주도의 산업화와 지역발전은 지방정부의 관리능력을 키우고, 주민에 대한 보건의료, 교육 및 사회복지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방자치는 이를 극복하면서 말 그대로 주민이 주인되는 ‘주민자치’ 시대를 향한 큰 걸음이었다.

참여정부 들어 추진된 지방분권은 이러한 구도를 해소하면서, 지역이 자립기반을 갖추고,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방향에서 추진됐다. 무엇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역할분담이 선결과제였다. 중앙정부는 큰 틀에서 기획·조정·지원 역할을 맡고, 주민생활과 직접 관련된 복지와 재정 등 집행역할은 지방정부로 단계적으로 이양하는 방향이 제시됐다.

2003년 7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발표한 ‘지방분권로드맵’은 이러한 중앙과 지방의 권한 재배분(10개 과제)을 비롯해 7대 분야 47개 과제를 선정했다. △재정분권(14개 과제 △자치행정역량 강화(8개 과제) △지방의정 활성화 및 선거제도 개선(2개 과제) △지방정부 책임성 강화(5개 분야) △시민사회 활성화(5개 과제) 등이다.

■ 47개 지방분권 과제

※ 굵게 표시된 부분 완료과제, 밑줄 친 부분 법령 제·개정 등 제도화 추진중인 과제

47개 과제를 일정에 따라 엄정하게 추진하기 위해 2003년 말에는 ‘지방분권특별법’이 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과 함께 입법됐다. 이를 기점으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행정치부, 국무조정실 등은 역할분담을 통해 본격적인 분권화 작업을 진행했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는 교육자치제, 자치경찰제, 특별행정기관 정비, 제주특별자치도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 권한 재배분과 관련된 사항을 중점적으로 맡았다. 행자부는 재정, 자치조직권 등을 포함한 국가사무와 지방사무로 구분된 40개 과제를 중심으로 분권화를 추진했다. 그 외에도 각 부처가 관여하고 있는 지방사무도 49개 개별 법률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 지방재정, 국가 총 재정의 50% 넘어

47개 지방분권 과제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추진됐는가. 행자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31개 과제(66%)가 완료됐다. 지방 분권화의 수준은 2002년 56.3%에서 2005년 9월말 현재 58.8%로 높아졌다.(2003년 56.8% → 2004년 57.2%) 재정분권 과제(14개)는 11개가 완료돼 가장 진척률(79%)이 가장 높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간의 권한 재분배와 자치단체의 역량 강화 분야는 다소 부진하다. 추진과정에서 부처간 입장차이, 이해관계 그룹간의 이견, 제도 도입에 관한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권양이양 못지않게 중요한 지방분권 과제는 역시 ‘돈’이다. 아무리 많은 권한을 자치단체가 가진다 해도 자립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다면 분권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재정분권 향상은 의미 깊다. 실제로 분권화 이후 지방교부세 비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2000년 15%에 머물던 게 2006년에는 19.24%까지 높아졌다. 5% 정도의 상승이 지방살림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의문을 가질수도 있으나, 금액으로 따지면 7조원이 넘는 돈이다. 또한 지방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담배소비세를 510원에서 641원으로 인상했고, 승마회원권 취득세를 과세 대상으로 추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재정분권의 효과는 국가 총재정 규모에서 차지하는 지방재정의 비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까지 지방재정은 국가 총재정의 절반을 넘지 못했으나(49.5%), 2005년에 이르러서는 52.8%까지 확대됐다. 지방정부가 집행하는 예산이 중앙정부 보다 많아진 것이다.

분권화의 성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시 주민참여를 넓히기 위해 이뤄진 여러 가지 제도 정비와 단계적 도입이다. 2005년에는 ‘주민소송제’가 도입돼 지자체의 불법적인 재무회계에 대해 주민들이 직접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올해 5월에는 ‘주민소환제’가 입법화됨으로써 지차제의 권력남용을 주민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내년 하반기부터는 비리를 저지른 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주민들이 직접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 자율과 책임의 분권을 위해

지난해 12월에는 ‘지방교육자치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 역시 지방분권 로드맵의 핵심과제 가운데 하나로, 자치경찰제와 함께 미해결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입법으로 지역 교육청의 교육감과 교육위원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게 됐다. 지방자치에 걸맞은 교육자치 실현의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교육감 선거는 오는 2월14일 부산시교육감 선거를 시작으로 각 시·도 교육감의 임기만료에 따라 차례대로 실시될 예정이다. 교육감 및 교육의원 통합선거는 2010년 전국지방동시선거와 동시에 실시된다.

이렇듯 행정과 재정을 비롯해 주민참여, 교육자치 등 각 분야 전반에 걸친 분권화는 지난 4년 동안 빠르게 진전돼 왔다. 그러나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다. 자치경찰제를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들이 있다. 무엇보다 제도 개선과 참여로 한껏 높아진 주민들의 자치 수준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지방 자치단체의 역량 강화가 중요한 과제다. 지방분권은 국가경쟁력과 주민서비스를 높이기 위해 분명히 가야할 길이지만, 지방에서 적절한 인프라 확보나 정책능력 향상이 없는 상태에서 추진될 경우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한 지방자치는 중앙과 지방의 유기적 역할분담, 분권에 걸맞는 자치단체의 재정자립과 역량 향상 그리고 비판과 견제를 통한 주민 참여·시스템 등 3박자가 두루 갖춰질 때 비로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