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서 개성상인과 중국 상인이 한 판 붙었다. 베이징 상인들이 짜고 개성상인의 인삼 구매를 보이콧 했던 것이다. 담합해 인삼을 사지 않겠다고 나서면 천리 길을 가져온 인삼을 도로 가져갈 리는 없고 결국 헐값에 내놓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개성상인은 떠날 날이 가까이와도 물러설 기색이 없고 오히려 인삼 다발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이를 본 중국 상인들은 기겁을 하곤 담합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인삼 값은 예년의 두 배로 쳐줘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쯤 탄 것은 조선에서부터 미리 준비해간 도라지였다. 개성상인은 중국 상인들이 담합해 인삼 구매를 보이콧할 것을 알고 미리부터 인삼과 비슷하게 생긴 도라지를 준비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들의 철저한 장사꾼 지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벼랑끝 협상(brinkmanship)’이라고 하는데, 상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위기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미 전략 미리 포착, '생즉사, 사즉생' 각오로 덤벼들어
그런데 이 전략이 오늘날 통상협상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협상에서도 통한 것 같다. ‘벼랑끝 협상’이라는 어휘가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분명 협상에 있어서는 하나의 전략으로 활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은 2일 오후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됐음을 접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막판 고위급 회담(3월26일~4월2일)에 나서기 전에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 떠올랐다고 한다. ‘깨져도 좋다’ 마음먹고 덤벼들면 될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의 다짐은 협상과정에서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26일 고위급 협상장에 앉자마자 "31일 새벽1시(미국시간으로는 30일 오후 6시)가 데드라인"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렇게 알고 있겠다’하고는 내심 ‘진짜인지 한번 가보자’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
미측은 시한이 다가오면 한국이 상당한 양보안을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작은 카드 하나 던져주고 버티기로 일관하는 모습에 아연질색 했을 것이다. 결국 시한이 임박해서 미측은 ‘48시간 더 하자’고 나왔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이 때 ‘아, 미국이 몸이 달았구나, 협상은 무조건 타결된다’는 판단이 섰다고 한다. 우리 쪽에서는 핵심 카드를 그대로 들고 있었으니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전략은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연장 협상에서 시한을 20분 남겨둔 상태에서 미국은 버티기에 한계를 느끼고 자동차 관세를 대폭 개선하는 안을 내놓았다. 미국 자동차업계의 의회 입김이 강한 자동차 분야는 미국에게 민감한 품목이었다. 고위급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도 언디파인드(미분류) 상태였다.
‘비합산 조치’ 공격카드로 만들어 미측 요구 철회
또 이번 협상에서는 우리 협상단이 바트나(BATNA, 최상의 대안)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며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막판 협상에서 ‘판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무역구제 협상에서 우리는 미측에 비합산 조치(반덤핑 조치 발동을 위한 산업피해 판정 때 한국산은 분리해서 평가)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초반부터 미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값’을 높게 올려놓고 막판에 우리가 막아야 하는 것과 맞바꾸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값을 키워놓고 난 다음 미국이 ‘도저히 안 되겠다’고 나오면서 우리도 신약 최저가 보장과 투자자-국가간 분쟁해결절차(ISD)의 예외조항 등 ‘내줄 수 없는 것’을 덜어냈다.
미국의 쌀 개방 요구에 대해서도 맞불 작전을 폈다. 우리의 쌀만큼 미국에 중요한 ‘존스액트’를 꺼내든 것이다. 존스액트는 미 연안의 승객.화물 수송은 미국서 만들어진 미 국적선에만 허용하는 제도다.
이들 사례 이외에도 이번 한미FTA 협상에는 다른 나라와의 FTA를 위해 전략상 드러내놓을 수 없는 비사(秘史)가 적지 않다. 과거와 비교해 우리의 협상력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협상력 하나로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상대로 충분히 실익 있는 협상결과를 끌어내는 모습을 대하는 것은 우리에겐 매우 낮선 일이다.
‘미국에 밀릴 것 뻔하다’ 초기 분석과는 정반대
한미FTA 협상이 시작될 때만 해도 어느 시사주간지는 “체급이 다른 대표 선수가 ‘FTA 테이블’에서 맞선다”며 ‘미국에 밀릴 것이 뻔하다’는 자조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 시작 당시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협상단.
그 배경에는 과거 통상협상에 대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1994년 외규장각 반환 협상, 1996년부터 2년 넘게 진행된 한일어업협정 협상 등에서 우리의 협상력은 항상 ‘2%’ 부족했다. UR협상 때는 ‘이면 합의’ 논란으로 큰 파장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1998년 여러 부처로 흩어져 있던 통상협상 권한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로 일원화한 이후 협상테이블에서 조금씩 협상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한미자동차 협상에서는 미국의 슈퍼301조를 철회했고 99년 한미 사회보장협정에서도 우리 주재원들의 연금문제를 해결했다.
한.칠레 FTA는 역대 사상 ‘최고의 협상’으로 평가됐다. 칠레는 향후 거대 경제국과의 FTA를 위한 '연습게임' 상대로 최적이었다. 협상결과도 농산물 피해를 최소화한 대신 공산품 수출시장을 확대시켰다고 후한 점수를 받기도 했다.
향상된 우리 통상협상력은 분쟁해결절차 소송에서도 확연히 들어났다. 1998년 이후 미국 등을 대상으로 WTO 분쟁해결절차에 7건을 제소한 결과 6건을 승소로 이끌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당시 외교부 고문변호사와 WTO 수석법률자문관을 지내며 큰 역량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2003년 ‘FTA 추진 로드맵’을 만들고 주도적으로 개방전략을 세운 것도 역대 처음이다. 수출과 무역으로 부강해진 나라임에도 통상협상 때마다 국내 산업보호에만 급급해 방어적 자세로 일관해 온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잘 자란 협상전문가, 대통령 지지 업고 '장사꾼 기질' 발동
통상전문 조직과 함께 맨파워를 꾸준히 배출한 것도 이번 한미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초석이 됐다. 김현종 본부장을 비롯해 김종훈 수석대표, 이건태 지적재산권 분과장, 안명수 정부조달 분과장, 최경림 투자분과장, 박석번 노동.환경 분과장, 민동석 농업협상 대표, 남영숙 통신.전자상거래 분과장 등은 ‘주 제네바 대표부’에서 통상협상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로 육성됐다.
사실 통상협상은 한국시장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통상협상가는 ‘얻을 게 없는’, ‘잘해야 본전’인 자리로 인식돼 왔다.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다른 자리로 옮길 때까지 조용히 현상유지 하려는 ‘보신주의’가 강했고 이는 협상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대통령이 막판 협상에서 버팀목이 돼 줬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번 한미FTA 협상은 달랐다. 당장 김현종 본부장만 해도 2003년 통상조정관 시절 ‘FTA 추진 로드맵’을 작성한 데다 ‘선진형 통상국가로 가려면 미국과 FTA를 해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득한 장본인으로, 책임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종훈 수석대표도 ‘국가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내 일’이라는 각오로 협상에 나섰던 인물이다.
또 우리 협상단이 막판까지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종 본부장은 한미FTA 타결선언 기자회견에서 “국민과 국회의 질책과 격려에 감사드린다”며 특히 대통령은 어려운 협상 때마다 버팀목이 돼 줬다고 강조했다.
통상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고 통수권자의 지지가 없으면 좋은 협상결과가 나오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통상교섭본부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한·칠레FTA 등 중요한 협상 때 앞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고비 때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전화통화로 걸림돌을 제거했다. 지난달 30일 김현종 본부장과 김종훈 수석대표가 청와대 보고를 갔을 때는 “협상이 잘 되도, 깨져도 정치적 부담이 있을 텐데 내가 다 책임지겠다. 협상 일선에 있는 당신들은 장사꾼 마음으로 균형을 맞춰가며 받아낼 것은 다 받아내라”고 힘을 실어줬다.
이번 미국과의 FTA 협상은 눈에 보이는 손익계산서뿐만 아니라 통상협상력 향상 측면에서 큰 자산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유럽연합과 중국, 일본과의 FTA에서 하나의 든든한 매뉴얼이 될 것이다.
경희대 성극제 국제대학원장은 "협상결과에 대해서는 '중상급 이상'이라고 평가한다"며 "협상능력도 과거 UR협상 등 때와는 월등히 향상된 것으로 평가돼 협상단에게는 'A-'의 성적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개선해야 할 사항도 적지 않다. '동의 명령제 도입'과 관련해 관계부처간 의견조율이 미숙했던 것이나 문서유출로 협상전략이 노출된 사건, 미숙한 국내 설득과정 등은 앞으로 진행될 통상협상이 보다 원숙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개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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