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통상협상의 치열한 라운드가 끝나면 협상의 당사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수사학’이 있기 마련이다. 협상 파트너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외교적 언급에서부터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한 내부용 멘트까지 다양하다.
이익의 균형을 맞춘 협상이지만 나름대로 각기 다른 이유로 인해 이익의 균형추를 자기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국측 여론 무마용 수사학을 협상 결과 '흠집내기'에 이용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일부 우리 언론은 상대측의 국내용 수사를 협상 반대나 협상결과에 대한 ‘흠집내기’의 명분으로 이용할 때가 많다.
최근 국내 언론에 불거진 재협상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신문은 마치 웬디 커틀러 한미 FTA 협상 미국측 수석대표가 연설에서 한국과의 재협상을 거론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당시 행사 발언 내용의 원문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는 11일 오후 2시(미국 시간)부터 워싱턴 DC 소재 헤리티지 재단이 한미 FTA를 주제로 개최한 학술행사에 참석해 연설 및 질의응답을 했으며, 한미FT협상이 깨질 만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타협안을 마련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특히 “미 행정부가 미 의회에 한미 FTA를 적극 설명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합의문이 공개되면 미 의회내에서 지지 분위기가 확산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쌀 문제 대해 커틀러 수석대표는 한국측이 어떤 상황에서도 협상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설명했으며, 개성공단 문제는 합의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차후에 위원회를 구성,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는 미 행정부와 의회간 '토론'이 한국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논의일 뿐이라고 말했다.
국내 언론에 ‘커틀러, 한미FTA 일부 재협상 가능성 시사’라는 형태로 보도된 부분은 당시 행사에 참석한 연합뉴스 특파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과정에서 나왔다. 그런데도 국내 언론에는 마치 커틀러가 연설에서 재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과장돼 전달됐다. 주미한국대사관 홍보원의 ‘코러스 하우스’가 녹취한 당시 질의 응답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o Yonhap: Some members of Congress have been saying that they will seek to make changes in the Korea-US FTA. (Please forgive my English.) Is that legally possible and is it the position of the USTR that such changes can and will be made? o 질문(연합뉴스): 미 의회 일부 의원들이 한미 FTA 합의를 변경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경이 법적으로 가능한 지 USTR 입장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o Cutler: I think that what you might be referring to is ongoing discussions between the administration and the Hill with respect to labor and possibly other provisions. These discussions are ongoing now between the administration and Congress. We’ve made Korea aware of these discussions and once the discussions are concluded we will then be in a position to figure out with Korea the best way to move forward.
o 답변(커틀러): 미 행정부와 미 의회간에 노동분야 및 기타 조항에 대한 토론이 진행중인 사실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미 행정부와 의회간에 이러한 토론들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한국측에 이러한 토론에 대해 알렸으며 일단 (미국내에서) 토론이 결론나면, 한국측과 일이 진전되도록 하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내는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커틀러 수석대표의 말은 노동 등 몇가지 분야에 대해 의회와 토론하고 있으며 결론이 나면 이를 구체화하고 해결하는 최선의 방안을 한국측과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재협상과는 거리가 있는 언급이다. 특히 이같은 언급은 커틀러 대표가 연설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기자의 질문에 논의의 진행상황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들은 다음날 마치 커틀러 대표가 재협상을 시사한 것으로 확대 보도했다.
“재협상은 결코 없다”-“재협상 거론한적 없다”
이같은 보도를 토대로 언론들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잇따라 재협상 여부를 질문했고 정부는 “재협상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사태가 커지자 커틀러 대표는 다음날인 12일(미국시간)워싱턴을 방문한 한국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한국 일부에서 미국이 재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정확하지 않은 (very inaccurate)’ 이야기”라며 “미국은 한미FTA 재협상을 거론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미국 내 누구에게서도 재협상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면서 “재협상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한 적 있느냐”고 반문까지 했다.
커틀러 대표는 같은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한미 FTA 재협상 문제를 거론한 것처럼 보도된 것과 관련, “그렇지 않다”며 이의를 표명하고 “현재 미 행정부와 의회간의 협의 결과가 나오면 한국측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동 등 FTA 관련 기타 조항들에 대해 행정부와 의회간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협의 결과가 나오면 한국과 적절한 진전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한 게 전부다. 나의 진의가 일부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한국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논의일 뿐"
그렇다면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과연 어떤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민주당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 의회는 노동·환경 분야에서 새로운 통상정책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는 국제적 노동기준(강제노동 금지·취업차별 금지) 등에 대한 검토와 환경기준 강화 등이 주요 내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각국이 국제노동규약이나 환경 관련 국제다자간협정 등을 보다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미국과 다른 나라간 FTA 협정에도 이와 관련된 보다 뚜렷한 의무 규정을 둘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새로운 통상정책은 아직 미국 의회와 행정부 내에서도 공식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다. 국제노동기구의 권고기준은 미국도 모두 충족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이번 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한국의 노동·환경 관련 기준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점과 지난해 말 노사정이 합의하고 국회를 통과한 노사관계 로드맵을 미국 측에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한미FTA 노동분야는 서로 상대국의 법률을 존중하는 선에서 타결됐다. 또 결사의 자유 등 국제적으로 인정된 노동권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규정도 마련했다.
분명한 것은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토론’이 한국을 특정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커틀러 대표의 말처럼 그것은 미국내 노동문제까지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토론일 뿐이다.
특히 노동권에서 우리는 미국에 밀릴 게 없다. 노동부에 따르면 양국이 국제노동기구(ILO)와 체결한 비준 협약은 전체 187개 중 한국이 22개인 반면 미국은 14개에 불과하다. ILO의 8개 핵심협약에서도 한국은 남녀 동등보수 협약을 비롯, 고용ㆍ직업상 차별금지 등 4개를 비준했지만 미국은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 등 2개만 비준했다.
'수사학'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익 극대화'에 도움 안돼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민주당의 새 통상정책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한국의 경우 노동·환경 분야에서 별 문제가 없다며 한국보다는 노동·환경기준이 크게 미달한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와의 협정을 겨냥한 요구라는 평가다. 또 노동이나 환경분야에서 지금보다 더 강화된 기준을 내놓을 경우 자칫 미국 기업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미국 내에서조차 논란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정부는 “재협상은 결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종훈 한미 자유무역협정 수석대표도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재협상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이 질문에 “딜(협상)이 됐으면 끝난 것”이라며 “어떤 종류든 재협상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
한미FTA의 공식 서명과 비준을 앞두고 미국이 우리 국회를 주목하듯 우리가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론이 재협상론을 앞 다퉈 소개하거나 미국측의 국내용 수사학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내 이해관계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것은 한미FTA의 최대 목표인 ‘경제적 실리의 극대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byun121212@daum.co.kr
